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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10) - 안민가·찬기파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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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攴治良羅
此地肹捨遺只於冬是去於丁爲尸知
默惡攴持以攴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안민가>

「君은 아버지요                     君은 아비요
臣은 사랑하실 어머니요                 臣은 사랑하시는 어미요,
民은 어린 아이로고!」 하실지면,             民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民이 사랑을 알리이다.                   하실진대 民이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살손 物生이                 大衆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어 다스려져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리이다.              할진대 나라 保全할 것을 알리라.
아으,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할지면,           아아,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나라 안이 태평하니이다.                  한다면 나라가 太平을 持續하느니라.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攴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碩惡希
郞也持以攴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栢史叱枝次高攴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찬기파랑가>

「열치매                        흐느끼며 바라보매
나타난 달이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감이 아니야?」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새파란 내[川]에                     모래 가른 물가에
耆郞의 모양이 있어라!                  耆郞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
이로 냇가 조약에                     逸烏내 자갈 벌에서
郞의 지니시던                       郞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과저」                   마음의 갓을 쫓고 있노라.
아으, 잣[柏] 가지 드높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서리를 모르올 花郞長이여!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경덕왕이 재위한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神)들이 때때로 궁전 뜰에 나타나 왕을 모시기도 하였다. 어느 해 3월 삼짇날에 왕이 귀정문 문루에 행차하셔서 좌우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누가 나가서 영복한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그 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풍이 정결하고 당당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그 분을 모셔다 뵙게 하였다. 왕은
 "내가 말하는 영복한 스님이 아니다."
하고 돌려 보냈다. 다시 한 스님이 헤진 장삼을 입고 앵통을 짊어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문루 위로 맞아들이고, 통 속을 살펴보니 차 달이는 기구를 담았을 뿐이었다. 왕이
 "네가 누구냐?"
고 묻자, 그는
 "충담입니다."
하였다. 왕이
 "어디서 오는 길인가?"
하니, 충담은
 "소승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오늘도 벌써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고 하였다. 왕이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느냐?"
하고 물으니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차 맛이 특이하고 그릇에서도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은
 "짐이 듣건대 대사가 기파랑을 기려서 사뇌가를 지었고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고 묻자, 충담사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노래를 짓도록 하라."
하니 충담사는 곧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를 봉하려 하였으나 재배하며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안민가>
 찬기파랑가는 이렇다.
<찬기파랑가>

- 『삼국유사』권2, 기이(紀異), 경덕왕 충담사

 이 뒤로는 『삼국유사』에 경덕왕과 차대 혜공왕, 그리고 표훈대덕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은 '경덕왕 충담사·표훈대덕' 조(條)이지만 뒷내용은 살짝 빼버렸지요^^; 어쨌든, 충담사 역시 두 편의 향가를 지은 것으로 원문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먼저 <안민가>부터 살펴볼까요. <안민가>는 기본적으로 치리가(治理歌)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밝힌 교술적 성격의 노래이며, 당대의 정치 상황을 드러내는 정치적 노래이기도 하지요.
 처음에는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아버지, 신하는 어머니, 백성은 아이들. 이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정치가 제대로 된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요. 당대 왕당파와 비왕당파의 권력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고 하는데 - 월명사의 향가 부분에서 '두 개의 해' 역시 정치적 혼란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네요. 그리고 두 번째, 5-8행에서 경제적 위기의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먹여 다스린다는, 즉 항산(恒産)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이 부분에는 경덕왕 말년, 재난이 심해서 백성들이 끼니도 잇기 힘들었던 모습이 보입니다. 특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즉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대처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것이란 표현은 그 위기감의 정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논어』 <안연편>의 '君君臣臣父父子子'를 원용하며 각자 직분을 다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찬기파랑가>. 배경 설화를 보면 왕에게까지, 즉 그만큼 널리 <찬기파랑가>가 알려졌음을 알 수 있지요. <찬기파랑가>는 <보현시원가>와 함께 향가 어석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한시와 함께 실린 <보현시왕가>와는 달리 연구자들마다 편차가 큰 <찬기파랑가>가 어떻게 그런 위치에 놓일 수 있는지 여쭤보니 11분절로 '끊어읽기'가 명료하다네요. 그런데 어떻게 읽든 간에 10구체 향가의 기본 해독인 4-4-2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게 여전히 이견이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양주동 선생의 해독은 3-5-2로 끊어읽기가 가능합니다. 특히 대화체로 이루어진다는 게 이색적이지요. 1-3행의 '달'은 기파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존재임을 드러내지요. 창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며, 기파랑이 곁에 없는 상황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의 응답이 이어집니다.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다고 하고 있지요. 이 냇가는 또한 지워버릴 수 없는 청사(靑史)를 의미합니다. 화자에게서 기파랑이 사라질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냇가 조약에 기파랑이 지녔던 '마음의 끝'을 좇고자 한다고 말을 하네요. 이 조약돌은 보잘 것 없는 존재, 즉 화자 자신을 뜻하는 걸로 보아 자기 다짐이라고 해석을 하는 한편, 원만하고 강직한 기파랑으로 보아 고매한 인격의 일부라도 닮고 싶다는 뜻으로도 해석을 합니다. 마지막 9-10행은 화자의 독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잣가지가 높아 서리 - 시련을 모를 화랑의 우두머리, 기파랑의 고고한 인품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반면 김완진 선생의 해독은 5-3-2로 끊어읽기가 가능합니다. 흐느끼며 바라보니, 달빛에 반짝이는 이슬이 흰 구름 따라 떠 간 언저리의 물가, 기랑의 모습을 닮은 수풀이 있지요. 그 이슬이 풀잎 끝에 맺혔는지 눈가에 맺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일오라는 냇가의 자갈 벌에서 기파랑이 지녔던 마음의 갓을 쫓고 있습니다. 분명 화자와 기파랑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겠지요. 그러면서 잣나무 가지가 높아서 눈이라도 덮지 못한 고깔을 예찬합니다.
 뭐, 어떤 해석을 따르던 간에 달과 구름, 잣과 서리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구사하여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든 흔히 화랑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패기나 용맹 등 무사적인 요소는 거의 보이지 않지요. 아마 삼국통일 이후, 화랑 집단의 세력이 쇠퇴한 뒤에 정신적인 괴로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전성기를 지난 늙은 장군 - 기파랑의 '기(耆)'자는 '늙은이', 한글 사전을 보면 예순이나 일흔 이상의 늙은이라고 하고 있네요. - 의 모습이 '달'의 해석과 관련지어서 고결하게 혹은 비통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별다른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화랑도 전체의 모습이 나이든 기파랑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입맛이 씁쓸해지더군요.

 무언가 내용이 간단한 듯한데, 웬만큼 할 얘기는 다 했으니- 이젠 또 다음으로'ㅁ'/ 경덕왕대의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향가를 다룰 차례입니다:) 스터디원들한테도 얼음집을 공개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대학원 입학 전까지는 그래도 고전시가 한 번 쯤 훑어보고 가야 되지 않겠어요^^;

by 玄月 | 2008/11/25 00:48 | 맛있는 공부 | 트랙백 | 덧글(4)

향가 (9) - 도솔가·제망매가

 

* 단 하루지만, 까만 스킨에 살짜쿵 동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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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日此矣散花唱良        오늘 이에 「散花」를 불러      오늘 이에 散花 불러
巴寶白乎隱花良汝隱       뿌리온 꽃아, 너는,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곧은 마음의 命을 부리옵기에,      곧은 마음의 命에 부리워져
彌勒座主陪立羅良        彌勒座主를 모셔라!          彌勒座主 뫼셔 羅立하라.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生死路는                         生死 길은
예 있으매 젛이여서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 말도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느닛고.                    몯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같이,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가는 곳 모르온저.
아으, 彌陀刹에 만날 나는                   아아, 彌陀刹에서 만날 나
道 닦아 기다리련다!                    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경덕왕 19년(서기 760) 경자 4월 초하룻날, 해 둘이 나란히 떠서 10여 일간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이 진언하기를,
 "인연 있는 스님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드리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조원전에 단을 깨끗이 모시고 청양루에 행차하여 인연 있는 스님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월명사란 이가 천백사의 남쪽 길로 지나가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들여 단을 열고 계청을 지으라 명했다. 월명사는 왕께 아뢰기를,
 "저는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오직 향가만 알고 범패 소리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이미 인연 있는 스님으로 정하였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다."
고 하였다. 월명사는 이에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가사는 이러하다.
<도솔가>
 이것을 시로 다시 풀어보면 이렇다.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청운에 한 떨기 꽃 뿌려 보냈네
은근히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
멀리 도솔천의 큰 선가(仙家)를 맞았네

 지금 세속에선 이것을 <산화가>라 하나 잘못된 것이므로 <도솔가>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산화가>는 따로 있으나 문장이 번다해서 싣지 않는다.
 <도솔가>를 지어 부른 뒤 곧 두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왕은 월명사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차 달이는 기구 한 벌과 수정 염주 백 여덟 개를 주었다. 그런데 홀연히 모습이 정결한 한 동자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차와 염주를 받들고 궁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그 동자를 두고 월명사는 궁중 안의 심부름하는 아이라 하고, 왕은 대사의 시중을 드는 아이라 하였으나, 그 현묘한 징표로 보나 모두가 아니었다. 왕은 매우 이상스럽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를 추적하게 하였는데, 동자는 내원의 탑 속에 숨어 버리고 차와 염주는 내원의 남쪽 벽에 그려 놓은 미륵보살의 성상 앞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월명대사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미륵보살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 일은 온 나라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월명사를 공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더 주면서 정성껏 표창했다.
 월명사는 또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그를 추모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지전을 서쪽으로 날려보내 사라지게 했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제망매가>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한 번은 달 밝은 밤에 그가 사천왕사 문 앞 큰 길에서 피리를 불며 지나갔는데 달님이 그 소리에 운행을 멈춘 일이 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월명리라 했으며, 월명사도 이로 인해서 이름이 났다. 월명사는 능준대사의 문인이다. 신라 사람들 중에는 향가를 숭상하는 이가 많았는데, 이것은 대개 『시경』의 송(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찬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바람이 돈을 날려 저승 가는 누이 노자로 쓰게 했고
피리 소리가 밝은 달을 흔들어 항아를 머물게 했구나
도솔천이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한 곡조로 쉽게 맞았네.


- 『삼국유사』권5, 감통(感通), 월명사 도솔가

 배경 설화도 그렇고, 지은이도 그렇고 <도솔가>와 <제망매가>는 같이 설명하는 게 편하지요:) 특히 향가를 다루며 8세기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일단 당대 최고의 향가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월명사가 4구체의 향가를 창작했지요. 이 <도솔가>는 '호칭-명령-가정-위협'이라는 주술 노래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물론 불교노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불교의 의식에 사용된 주술계 노래라는 견해가 타당해 보이기에 이쪽을 따릅니다), 위협적인 어법이 없으며 명령도 약화되어 나타납니다. 즉 신비한 주술의 세계에서 서정적인 불교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민요계 향가가 상층부로 가서 서정시가가 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뒤에서 볼, 동시대의 <도천수대비가>는 사뇌가계 향가가 민중층으로 내려가는 양상을 보여주고요. 이를 통해 향가가 정말 명실상부한 '신라인의 보편 시가'로 확립됨을 알 수 있습니다.

 <도솔가>를 먼저 보도록 할까요. 2행의 '巴寶'가 해석의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양주동 선생은 뿌리다(散)로, 홍기문 선생은 '빠호'(옛 한글이 안 먹히는 슬픔ㅠ 첨부된 한글 파일을 참조하시면 좀 도움이 될 듯하네요;;)로 보아 여러 꽃 중에서 선발된 것으로, 김완진 선생은 '돋우다/솟구치다'로 본다네요. 해석만 보면 꽤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 정작 앞뒤의 문맥과 함께 보면 셋 다 크게 차이는 나지 않습니다. 산화공덕과 관련 있는 꽃, 정도가 되겠네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리는 또 다른 문제는 '① 유리왕대의 도솔가와 같은가 ② 도솔가와 산화가의 관계는 어떤가'라네요. 차례대로 살펴보지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1, 유리왕 5년의 기록을 보면 유리왕은 국내를 순행하다가 늙은이가 얼어죽을 지경이 된 것을 보고 자신의 죄라고 말하며, 관리에게 명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며 부양케 하였다고 합니다. 이 해에 민속이 즐겁고 편안하므로 비로소 <도솔가>를 지으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였다고요. 이것과 향가 <도솔가> 둘 다 '도살풀이/도살노래'라고 하여 회생(回生), 부활(復活), 복원(復元)의 뜻을 가진, 같은 향가라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유리왕대의 <도솔가>는 치리가(治理歌)이고, 월명사의 <도솔가>는 불교 사뇌가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요. 아마 후자쪽이 더 타당하리라고 봅니다. 이 맥락에서 '민속이 즐겁고 편안'한 것과 관계가 있는 노래가 나올 까닭이 없으니까요.
 다음은 <도솔가>와 <산화가>와의 관계입니다. 양주동 선생의 경우, 1행에 '散花唱良'이라고 하므로 원래 <산화가>로 지어진 것이라 하는 반면, 이전의 오구라 신페이나 이후의 많은 학자들은 <산화가>를 순불교적 게송 같은 것으로, <도솔가>는 산화의식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지요. 종교 얘기만 나오면 가방끈 짧은 저는 입다물고 조용히(…)
 '두 개의 해가 함께 보였다[二日竝現]'이라는 산문 기록에도 이견이 있더군요. 하나는 기록 그대로를 존중하여 태양계의 이변을 해가 두 개인 것처럼 인지했다는 의견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 정치 사회의 변혁을 담고 있다는 의견입니다. 이를테면 군왕이 있음에도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급격하게 부상하는 것 말이지요. 전자든 후자든 노래의 성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보이지만- 왠지 후자쪽이 더 강하게 끌리네요. 글로써 정치적 변란을 잠재웠다고 할 수 있는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다음은 <제망매가>입니다. 멋모를 때는 '제망/매가'라고 읽었는데, 정확하게는 '제/망매/가'가 맞지요. 사실 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습니다. 2행에서 '(죽고 사는 길이 - 여담이지만, 북한의 '죽사릿 길'이란 표현도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렸다고 봅니다) 여기 있으매, 두려워하고'라는 해석과 '~ 있으매, 머뭇거리고'라는 해석이 존재하지만 전체 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지요. 또한 10구체 향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예시로 쓰기도 좋은 작품입니다.
 우선 1-4행에서는 누이의 죽음에 마주선 괴로운 심경이 잘 드러나 있지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 것인가'라는 탄식 속에서 육친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 5-8행에서는 개인적인 아픔이 생명체 일반의 원리로 확대되고 있고요. 모든 유한한 생명을 지배하는 힘인 '바람'과 보잘것 없는 개체의 이미지인 '잎'의 대립적 심상에서 모든 생명체의 무상성(無常性)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아참, 그리고 흔히들 '한 가지'는 부모로, '잎'은 형제로 해석하지만 이를 좀 더 확대해서 우리가 머무는 세상과 모든 인간 존재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전개된 시상은 9-10행에서 집약·마무리됩니다. 첫머리의 감탄사는 이처럼 심화된 고뇌의 극한에서 터져나오는 탄식이자 종교적 초극을 위한 탄성이기도 하지요. 즉, '감탄'이라는 것이 인간이 경험적으로 예측가능한 수준을 넘어설 때 나온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절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후에는 지상적 삶의 무상함을 넘어 광명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불교적인 발원(아미타신앙)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러고보면 육친의 죽음을 다룬 시가 참 많군요. 아들의 죽음을 다룬 <유리창Ⅰ>이나 <은수저>, <눈물>, 형제의 죽음을 다룬 <이별가>, <하관>, <가을 무덤-제망매가>… 그 중에서 똑같이 누이의 죽음을 소재로 한 <가을 무덤 - 祭亡妹歌(제망매가)>를 소개하며 오늘은 이만 끝낼까 합니다.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神經을 앓는
中風病者로 태어나
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가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 written by 기형도

 다음에는 월명사와 쌍벽을 이루는 충담사의 향가가 이어지겠습니다. 분명히 또 엄청 길어지겠지만-_- 반(半)굽이를 돌아나온 듯하니 무언가 좀 뿌듯하네요^^a

by 玄月 | 2008/11/20 20:41 | 맛있는 공부 | 트랙백 | 덧글(2)

제헌절 단상

 
 어쩌다보니 방에 들어온 게 이 시간이지만-_-; 그래도 생각난 김에.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무렵, 진중권의 책을 읽었다. 하루하루 만화책 보는 것을 낙으로 알며 살아가던 중학생에게 다가온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그대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후 10여년 째 진빠라는 포지션에는 별 변함이 없다. 현상들을 블랙유머로 기워 풍자라는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재주에 얼마나 감탄했었는지.
 그리고 이맘 때만 되면, '다시 뛰자'라는 운동에 대한 그 책의 지적이 다시 생각난다. 제헌절을 기념한다는 건 말 그대로 법을 소중히 한다는 것. 그런데 헌법을 파괴하는 행위를 두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운운하는 사람들이 왜 제헌절부터 광복절까지를 기념한다는 건지 알 수 없다고 했었지. 그 두 날이 특별한 국경일이 아닌 다음에야 개천절부터 삼일절까지도 계속 태극기를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며 특유의 비꼬는 듯한 말투로 써내려간 게 아직도 기억나는데-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마음 놓고 못 마신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온 것만 같다. 어느 순간에 제헌절은 국경일이되 공휴일에서 빠져 있구나. 그럼 누가 기억을 할 것 같아서? 이전에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질 때가 생각난다. 국어학자들의 반대가 줄줄이 이어졌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째 법학자들은 조용하다는 생각도 드는군. (임시정부의 법통을, 4·19혁명 정신을 이었다는 헌법 전문이 쪽팔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지만;;) 사실 이게 언제부터 논의된 일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나름 쉬는 날이 한 번 없어진 건데 생각보다는 조용하고,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아직 대학생이기에 - 원래 7월은 방학이니까 - 은행이, 관공서가 하루 덜 놀아서 편한 점은 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도 되는 걸까. 쉬지 않는 국경일을 누가 기억이나 할지. 다음에 학교에 나가거든 설문조사나 한 번 해보고 싶다. 혹시 한글날이 언제인지 아냐고. 그리고 제헌절이 언제인지 기억할 수 있냐고.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은 뭐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당신들이 해야될 일이 '대한민국 법통 바로 세우기'라면 - 이승만과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 삼일절에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것 대신 제헌절을 지키는 것에 힘써야 되지 않을까.

+)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찌 제헌절을 공휴일로 기념하겠습니까. 한글이 만인에게 나랏말씀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찌 한글날을 공휴일로 기념하겠습니까. 365일 닥치고 포맷,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라는 포스팅을 올리면서 조낸 외롭지 말입니다. - 이외수, <하악하악>, 96쪽. (7.29 추가)

by 玄月 | 2008/07/18 01:44 | 생각의 타래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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