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5일
향가 (10) - 안민가·찬기파랑가
classic_9.hwp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攴治良羅
此地肹捨遺只於冬是去於丁爲尸知
默惡攴持以攴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안민가>
「君은 아버지요 君은 아비요
臣은 사랑하실 어머니요 臣은 사랑하시는 어미요,
民은 어린 아이로고!」 하실지면, 民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民이 사랑을 알리이다. 하실진대 民이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살손 物生이 大衆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어 다스려져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리이다. 할진대 나라 保全할 것을 알리라.
아으,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할지면, 아아,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나라 안이 태평하니이다. 한다면 나라가 太平을 持續하느니라.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攴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碩惡希
郞也持以攴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栢史叱枝次高攴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찬기파랑가>
「열치매 흐느끼며 바라보매
나타난 달이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감이 아니야?」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새파란 내[川]에 모래 가른 물가에
耆郞의 모양이 있어라! 耆郞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
이로 냇가 조약에 逸烏내 자갈 벌에서
郞의 지니시던 郞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과저」 마음의 갓을 쫓고 있노라.
아으, 잣[柏] 가지 드높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서리를 모르올 花郞長이여!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경덕왕이 재위한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神)들이 때때로 궁전 뜰에 나타나 왕을 모시기도 하였다. 어느 해 3월 삼짇날에 왕이 귀정문 문루에 행차하셔서 좌우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누가 나가서 영복한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그 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풍이 정결하고 당당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그 분을 모셔다 뵙게 하였다. 왕은
"내가 말하는 영복한 스님이 아니다."
하고 돌려 보냈다. 다시 한 스님이 헤진 장삼을 입고 앵통을 짊어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문루 위로 맞아들이고, 통 속을 살펴보니 차 달이는 기구를 담았을 뿐이었다. 왕이
"네가 누구냐?"
고 묻자, 그는
"충담입니다."
하였다. 왕이
"어디서 오는 길인가?"
하니, 충담은
"소승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오늘도 벌써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고 하였다. 왕이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느냐?"
하고 물으니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차 맛이 특이하고 그릇에서도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은
"짐이 듣건대 대사가 기파랑을 기려서 사뇌가를 지었고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고 묻자, 충담사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노래를 짓도록 하라."
하니 충담사는 곧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를 봉하려 하였으나 재배하며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안민가>
찬기파랑가는 이렇다.
<찬기파랑가>
이 뒤로는 『삼국유사』에 경덕왕과 차대 혜공왕, 그리고 표훈대덕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은 '경덕왕 충담사·표훈대덕' 조(條)이지만 뒷내용은 살짝 빼버렸지요^^; 어쨌든, 충담사 역시 두 편의 향가를 지은 것으로 원문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먼저 <안민가>부터 살펴볼까요. <안민가>는 기본적으로 치리가(治理歌)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밝힌 교술적 성격의 노래이며, 당대의 정치 상황을 드러내는 정치적 노래이기도 하지요.
처음에는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아버지, 신하는 어머니, 백성은 아이들. 이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정치가 제대로 된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요. 당대 왕당파와 비왕당파의 권력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고 하는데 - 월명사의 향가 부분에서 '두 개의 해' 역시 정치적 혼란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네요. 그리고 두 번째, 5-8행에서 경제적 위기의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먹여 다스린다는, 즉 항산(恒産)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이 부분에는 경덕왕 말년, 재난이 심해서 백성들이 끼니도 잇기 힘들었던 모습이 보입니다. 특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즉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대처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것이란 표현은 그 위기감의 정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논어』 <안연편>의 '君君臣臣父父子子'를 원용하며 각자 직분을 다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찬기파랑가>. 배경 설화를 보면 왕에게까지, 즉 그만큼 널리 <찬기파랑가>가 알려졌음을 알 수 있지요. <찬기파랑가>는 <보현시원가>와 함께 향가 어석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한시와 함께 실린 <보현시왕가>와는 달리 연구자들마다 편차가 큰 <찬기파랑가>가 어떻게 그런 위치에 놓일 수 있는지 여쭤보니 11분절로 '끊어읽기'가 명료하다네요. 그런데 어떻게 읽든 간에 10구체 향가의 기본 해독인 4-4-2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게 여전히 이견이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양주동 선생의 해독은 3-5-2로 끊어읽기가 가능합니다. 특히 대화체로 이루어진다는 게 이색적이지요. 1-3행의 '달'은 기파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존재임을 드러내지요. 창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며, 기파랑이 곁에 없는 상황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의 응답이 이어집니다.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다고 하고 있지요. 이 냇가는 또한 지워버릴 수 없는 청사(靑史)를 의미합니다. 화자에게서 기파랑이 사라질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냇가 조약에 기파랑이 지녔던 '마음의 끝'을 좇고자 한다고 말을 하네요. 이 조약돌은 보잘 것 없는 존재, 즉 화자 자신을 뜻하는 걸로 보아 자기 다짐이라고 해석을 하는 한편, 원만하고 강직한 기파랑으로 보아 고매한 인격의 일부라도 닮고 싶다는 뜻으로도 해석을 합니다. 마지막 9-10행은 화자의 독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잣가지가 높아 서리 - 시련을 모를 화랑의 우두머리, 기파랑의 고고한 인품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반면 김완진 선생의 해독은 5-3-2로 끊어읽기가 가능합니다. 흐느끼며 바라보니, 달빛에 반짝이는 이슬이 흰 구름 따라 떠 간 언저리의 물가, 기랑의 모습을 닮은 수풀이 있지요. 그 이슬이 풀잎 끝에 맺혔는지 눈가에 맺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일오라는 냇가의 자갈 벌에서 기파랑이 지녔던 마음의 갓을 쫓고 있습니다. 분명 화자와 기파랑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겠지요. 그러면서 잣나무 가지가 높아서 눈이라도 덮지 못한 고깔을 예찬합니다.
뭐, 어떤 해석을 따르던 간에 달과 구름, 잣과 서리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구사하여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든 흔히 화랑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패기나 용맹 등 무사적인 요소는 거의 보이지 않지요. 아마 삼국통일 이후, 화랑 집단의 세력이 쇠퇴한 뒤에 정신적인 괴로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전성기를 지난 늙은 장군 - 기파랑의 '기(耆)'자는 '늙은이', 한글 사전을 보면 예순이나 일흔 이상의 늙은이라고 하고 있네요. - 의 모습이 '달'의 해석과 관련지어서 고결하게 혹은 비통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별다른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화랑도 전체의 모습이 나이든 기파랑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입맛이 씁쓸해지더군요.
무언가 내용이 간단한 듯한데, 웬만큼 할 얘기는 다 했으니- 이젠 또 다음으로'ㅁ'/ 경덕왕대의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향가를 다룰 차례입니다:) 스터디원들한테도 얼음집을 공개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대학원 입학 전까지는 그래도 고전시가 한 번 쯤 훑어보고 가야 되지 않겠어요^^;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攴治良羅
此地肹捨遺只於冬是去於丁爲尸知
默惡攴持以攴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안민가>
「君은 아버지요 君은 아비요
臣은 사랑하실 어머니요 臣은 사랑하시는 어미요,
民은 어린 아이로고!」 하실지면, 民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民이 사랑을 알리이다. 하실진대 民이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살손 物生이 大衆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어 다스려져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리이다. 할진대 나라 保全할 것을 알리라.
아으,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할지면, 아아,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나라 안이 태평하니이다. 한다면 나라가 太平을 持續하느니라.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攴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碩惡希
郞也持以攴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栢史叱枝次高攴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찬기파랑가>
「열치매 흐느끼며 바라보매
나타난 달이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좇아 떠감이 아니야?」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새파란 내[川]에 모래 가른 물가에
耆郞의 모양이 있어라! 耆郞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
이로 냇가 조약에 逸烏내 자갈 벌에서
郞의 지니시던 郞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좇과저」 마음의 갓을 쫓고 있노라.
아으, 잣[柏] 가지 드높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서리를 모르올 花郞長이여!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경덕왕이 재위한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神)들이 때때로 궁전 뜰에 나타나 왕을 모시기도 하였다. 어느 해 3월 삼짇날에 왕이 귀정문 문루에 행차하셔서 좌우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누가 나가서 영복한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그 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풍이 정결하고 당당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그 분을 모셔다 뵙게 하였다. 왕은
"내가 말하는 영복한 스님이 아니다."
하고 돌려 보냈다. 다시 한 스님이 헤진 장삼을 입고 앵통을 짊어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문루 위로 맞아들이고, 통 속을 살펴보니 차 달이는 기구를 담았을 뿐이었다. 왕이
"네가 누구냐?"
고 묻자, 그는
"충담입니다."
하였다. 왕이
"어디서 오는 길인가?"
하니, 충담은
"소승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오늘도 벌써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고 하였다. 왕이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느냐?"
하고 물으니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차 맛이 특이하고 그릇에서도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은
"짐이 듣건대 대사가 기파랑을 기려서 사뇌가를 지었고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고 묻자, 충담사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노래를 짓도록 하라."
하니 충담사는 곧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를 봉하려 하였으나 재배하며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안민가>
찬기파랑가는 이렇다.
<찬기파랑가>
- 『삼국유사』권2, 기이(紀異), 경덕왕 충담사
이 뒤로는 『삼국유사』에 경덕왕과 차대 혜공왕, 그리고 표훈대덕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은 '경덕왕 충담사·표훈대덕' 조(條)이지만 뒷내용은 살짝 빼버렸지요^^; 어쨌든, 충담사 역시 두 편의 향가를 지은 것으로 원문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먼저 <안민가>부터 살펴볼까요. <안민가>는 기본적으로 치리가(治理歌)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밝힌 교술적 성격의 노래이며, 당대의 정치 상황을 드러내는 정치적 노래이기도 하지요.
처음에는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아버지, 신하는 어머니, 백성은 아이들. 이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정치가 제대로 된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요. 당대 왕당파와 비왕당파의 권력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고 하는데 - 월명사의 향가 부분에서 '두 개의 해' 역시 정치적 혼란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네요. 그리고 두 번째, 5-8행에서 경제적 위기의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을 먹여 다스린다는, 즉 항산(恒産)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이 부분에는 경덕왕 말년, 재난이 심해서 백성들이 끼니도 잇기 힘들었던 모습이 보입니다. 특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즉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대처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것이란 표현은 그 위기감의 정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논어』 <안연편>의 '君君臣臣父父子子'를 원용하며 각자 직분을 다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찬기파랑가>. 배경 설화를 보면 왕에게까지, 즉 그만큼 널리 <찬기파랑가>가 알려졌음을 알 수 있지요. <찬기파랑가>는 <보현시원가>와 함께 향가 어석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한시와 함께 실린 <보현시왕가>와는 달리 연구자들마다 편차가 큰 <찬기파랑가>가 어떻게 그런 위치에 놓일 수 있는지 여쭤보니 11분절로 '끊어읽기'가 명료하다네요. 그런데 어떻게 읽든 간에 10구체 향가의 기본 해독인 4-4-2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게 여전히 이견이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양주동 선생의 해독은 3-5-2로 끊어읽기가 가능합니다. 특히 대화체로 이루어진다는 게 이색적이지요. 1-3행의 '달'은 기파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존재임을 드러내지요. 창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좇아 떠가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며, 기파랑이 곁에 없는 상황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의 응답이 이어집니다. 새파란 냇가에 기랑의 모습이 있다고 하고 있지요. 이 냇가는 또한 지워버릴 수 없는 청사(靑史)를 의미합니다. 화자에게서 기파랑이 사라질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냇가 조약에 기파랑이 지녔던 '마음의 끝'을 좇고자 한다고 말을 하네요. 이 조약돌은 보잘 것 없는 존재, 즉 화자 자신을 뜻하는 걸로 보아 자기 다짐이라고 해석을 하는 한편, 원만하고 강직한 기파랑으로 보아 고매한 인격의 일부라도 닮고 싶다는 뜻으로도 해석을 합니다. 마지막 9-10행은 화자의 독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잣가지가 높아 서리 - 시련을 모를 화랑의 우두머리, 기파랑의 고고한 인품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반면 김완진 선생의 해독은 5-3-2로 끊어읽기가 가능합니다. 흐느끼며 바라보니, 달빛에 반짝이는 이슬이 흰 구름 따라 떠 간 언저리의 물가, 기랑의 모습을 닮은 수풀이 있지요. 그 이슬이 풀잎 끝에 맺혔는지 눈가에 맺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화자는 일오라는 냇가의 자갈 벌에서 기파랑이 지녔던 마음의 갓을 쫓고 있습니다. 분명 화자와 기파랑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겠지요. 그러면서 잣나무 가지가 높아서 눈이라도 덮지 못한 고깔을 예찬합니다.
뭐, 어떤 해석을 따르던 간에 달과 구름, 잣과 서리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구사하여 기파랑의 고매한 인격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든 흔히 화랑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패기나 용맹 등 무사적인 요소는 거의 보이지 않지요. 아마 삼국통일 이후, 화랑 집단의 세력이 쇠퇴한 뒤에 정신적인 괴로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전성기를 지난 늙은 장군 - 기파랑의 '기(耆)'자는 '늙은이', 한글 사전을 보면 예순이나 일흔 이상의 늙은이라고 하고 있네요. - 의 모습이 '달'의 해석과 관련지어서 고결하게 혹은 비통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별다른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화랑도 전체의 모습이 나이든 기파랑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입맛이 씁쓸해지더군요.
무언가 내용이 간단한 듯한데, 웬만큼 할 얘기는 다 했으니- 이젠 또 다음으로'ㅁ'/ 경덕왕대의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향가를 다룰 차례입니다:) 스터디원들한테도 얼음집을 공개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죠. 대학원 입학 전까지는 그래도 고전시가 한 번 쯤 훑어보고 가야 되지 않겠어요^^;
# by | 2008/11/25 00:48 | 맛있는 공부 | 트랙백 | 덧글(4)
2008년 08월 11일
향가 (5) - 원왕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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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多可攴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攴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當作句而看)
阿邪 此身遣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달하, 이제 달이 어째서
서방(西方)꺼정 가셔서 서방(西方)까지 가시겠습니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전(前)에 무량수불전(無量壽佛前)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보고(報告)의 말씀 빠짐없이 사뢰소서.
"다짐[誓] 깊으신 존(尊)을 우러러 서원(誓願)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을 도두와 두 손 곧추 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아으, 이 몸을 길이 두고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이루실까 [젛사옵네]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이루실까.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문무왕 때에 불가의 도를 닦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광덕과 엄장이었다. 두 사람은 좋은 벗으로 항상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극락세계로 가는 사람이 꼭 알리기로 하자."고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에 은거하면서(혹은 황룡사의 서거방에 있었다 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신 삼는 것으로 업을 삼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농사일에 힘쓰면서 지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 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에 어둠이 깔릴 때, 엄장의 창 밖에서 "나는 벌써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둘러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풍악 소리가 나고 빛이 땅까지 뻗쳐 있었다. 그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머물던 곳을 찾아가 보니 광덕은 과연 죽었다. 이에 그는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다 마치고 그는 광덕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남편은 이미 죽었으니 이제 나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소?" 하자, 그 아내가 "좋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날 밤 광덕의 집에 머물러 자면서 정을 통하려 하자, 그의 아내가 응하지 않고 하는 말이 "스님께서 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고 하였다. 엄장이 놀라면서 말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안 될 것이 있소?"하자, 그녀가 말하기를 "남편은 나와 동거한 지 10여 년이었지만 일찍이 한 자리에 눕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추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매일 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생각하였습니다. 혹은 16관(중생이 죽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닦는 16가지의 법)을 하여 관이 이루어지면 밝은 달이 문에 들어올 때 그 빛에 올라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정성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서방정토로 안 가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저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 걸음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인데, 지금 스님의 관은 동쪽으로 갈 수는 있을지언정 서방정토로는 갈 수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엄장은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나 곧 원효법사의 거처로 찾아가 정성껏 득도의 길을 물었다. 원효는 정관법을 지어서 권유하였다. 엄장이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한마음으로 관(미망을 깨치고 진리를 통달하는 것)을 닦아서 또한 서방 극락세계로 올라갔다. 정관법은 원효대사의 본전과 『해동고승전』 중에 있다. 광덕의 아내는 분황사의 종이었는데 바로 관음보살 십구응신 중의 하나다. 일찍이 광덕은 이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원왕생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첫 줄 '月下伊底亦(월하이저역)'의 해독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과연 작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지요.
먼저 첫 줄의 해독입니다. 향가는 향찰로 표기된 것이며 한자로 음 또는 뜻을 표기하지요. 따라서 어디에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해독에 차이가 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月下伊 / 底亦'으로 끊는 견해와 '月下 / 伊底亦'으로 끊는 견해가 있지요.
전자는 다시 몇 가지의 뜻으로 세분화됩니다.
첫째로 '달의 아래'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下伊(하이)'는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처격 '-해'로 봅니다. 여기 사이시옷을 덧붙여서 현대어의 '-의'로 해독하지요. '底亦(저역)'은 '아래, 밑'이라는 '底(저)'의 뜻에 '亦(역)'을 음으로 읽어 '믿예'로 보고요.
둘째로는 '下伊(하이)'를 '아리', 즉 '아래'로 읽고 '底亦(저역)'을 '저기'로 읽고 있습니다. '또한'이라는 뜻의 '亦(역)'이 어째서 '기'에 가까운 음으로 읽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_-;
셋째로 '月下伊(월하이)'를 '다라리'로 읽는 것입니다. 중세국어에서는 쓰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발음나는 대로 붙여쓰는, 이른바 '이어적기'를 할 수 있었거든요. (예를 들자면 '손이'를 '소니'로 쓰는 것처럼요. 근대국어, 즉 개화기까지의 한글 문헌을 읽는 게 힘든 것도 이와 같은 표기상의 차이에서 오는 이유가 큽니다) 그래서 앞부분 전체를 '달이'로 읽고, '底亦(저역)'을 '엇뎨역', 즉 '어째서'로 풀이하지요. 중간에 왜 '엇'이 끼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후자의 경우 '月下 / 伊底亦'이라 끊고 '달하 이뎨', 즉 '달이여 이제'라고 해독하지요. '下(하)'는 중세국어에서 지금의 '-아'와 비슷하게 쓰였던 말입니다. 부르는 말 뒤에 붙는다는 건 똑같지만(이를 '호격 조사'라고 하지요) 높임의 뜻이 더해진다는 게 조금 다릅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에서 '님금하 아라쇼셔'(임금이시여, 아십시오)와 같이 쓰이는 것처럼요. 그리고 '伊底亦(이저역)'은 '이제'로 간주합니다. 즉 서방정토 왕생의 염원을 직접 달에게 호소하는 노래, 라는 근거를 어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당대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입니다만, '기원'이라는 성격에서 그리고 '호소'라는 정서에서 이 편이 좀 더 묘미가 있다고 보이네요.
작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설이 있습니다. 일부의 향가처럼 누가 불렀는지 모른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적 화자가 달라짐에 따라 해석의 양상이,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정토왕생을 갈구하는 염원의 성격, 기원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정서의 질 등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여기에 관해서 많은 얘기가 있었지요. 대여섯 가지의 견해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발단은 산문기록의 끝 문장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였지요. 원문은 '其婦乃芬皇寺之婢盖十九應身之一德嘗有歌云', 즉 위의 설화에서 밑줄로 표시된 부분입니다. (편의상 一과 德 사이를 끊어 읽었습니다. 물론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德(덕)'을 앞쪽에 붙여 읽으면 광덕의 처가 노래를 지은 것이 되며, 뒤쪽에 붙여 읽으면 광덕이 노래를 지은 것이 됩니다. 여기에 '有歌(유가)'가 과연 '作歌(작가)'와 같은 뜻인가 하는 논란이 추가됩니다. 광덕의 처나 광덕이 노래를 지었다는 쪽에서는 '有歌(유가)'가 '作歌(작가)'의 관례적 표현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작자를 모른다는 쪽에서는 같은 뜻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여기에 9줄의 '此身(차신)'의 문제도 추가됩니다. 과연 '이 몸'은 누구일까요? 광덕의 처든 광덕이든 지은이가 분명히 있다는 쪽에서는 지은이 자신이라고 말하지요. 반면 작자를 모른다는 쪽에는 극락 왕생을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몸'이 될 수 있다는, 시적 자아의 집단성을 얘기합니다. 이런 논의 과정 속에서 광덕의 처는 보살의 화신이니 새삼 극락을 바랄 수 없으며, 표제 역시 <광덕·엄장>이라는 점에서 광덕이 지었다는, 즉 개인의 창작물이라는 설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작자를 모른다는 쪽은 집단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작품을 보고 있고요.
학계의 주류는 <원왕생가>를 광덕의 작품으로 보며, 한 개인의 신앙적 발원을 형상화한 개인적 서정시라고 하지요. 특히 설화 속에서 '달'이 나오고 있으니 노래 속의 달 역시 그가 수행하던 실제 상황에서 보고 있던 달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험의 반영이랄까요. 특히 이 '달'은 이 세상의 나와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서의 기원 대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반면 작자를 모른다는 쪽은 찬불가의 성격상 집단적 상상력이 표현된 것이라고 보지요. 특정 개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보편적·집단적 기원이라고 볼 때- 당대 삶의 고통을(기록은 신라 문무왕대, 라고 나와있습니다. 백제, 고구려, 그리고 당과의 전쟁까지 전란으로 가득한 시기였죠) 정토 왕생의 염원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당대 사회의 민중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종교쪽으로 치우치는 부분이 나오니 역시 가방끈이 짧은 게 또 표시가 나는군요. 음, 그치만 정말 궁금한 건 왜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으면서 10년 동안이나 광덕과 그 부인은 같이 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엄장의 모습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군요'ㅁ'
덧. 역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 역시 이와 유사한 모티브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를 이루기를 바라는 두 친구 - 각각 열심히 수도함 - 한 친구의 득도 - 다른 이의 득도'라는 전체 줄거리 안에 두 친구의 수도 정도를 알아보는 여인이 등장하게 되지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경우 부인이 아니라 야심한 밤에 한 여인이 찾아오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원효산설화>에서도 원효와 의상에게 비슷한 일이 있지요.
다시 덧. 양주동 선생 해독의 [젛사옵네]는 원문에는 없지만 해독을 하며 집어넣은 것이라 합니다. 풀이하자면 나를 버리고 48대원을 이루실까 두렵습니다, 정도겠네요. 하긴 이 모진 세상에 나만 버려두고 극락왕생을 하시겠다니 충분히 두려울 법하지요.
마지막 덧. 김완진 선생의 해독이 어학적으로는 더 근거가 있는 편이라고 합니다. 양주동 선생은 영문학 전공이고 김완진 선생은 국어학 전공이니 일단 기본 바탕에서 차이가 있지요. 어느 순간부터 교과서에서도 김완진 선생의 해독이 더 많이 보이더군요. 물론 영문학 전공이면서도 이 정도까지 해독을 하신 양주동 선생은 정말 국보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입니다. 이 분이 향가 해독에 뛰어든 것도 우리나라 옛 노래인데 일본인(소창진평. 오구라 신페이라고도 하지요)이 먼저 해독한 거에 화르륵 불타오르셔서 그랬다니 충분히 재미있으신 분이지요. 갹설하고, 그렇지만 김완진 선생의 해독에는 약점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4-5줄에 나오는 '攴'자 문제입니다. 목판으로 인쇄할 때라 '支'자가 떨어져나가 '攴'자로 되었으며, 이는 앞의 글자를 특정하게 음으로 혹은 뜻으로 읽으라고 지정하는 '지정문자'라는 설이지요. 물론 원전을 바꾸어 해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정문자라고 본다고 해도 음/훈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多可攴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攴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當作句而看)
阿邪 此身遣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달하, 이제 달이 어째서
서방(西方)꺼정 가셔서 서방(西方)까지 가시겠습니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전(前)에 무량수불전(無量壽佛前)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보고(報告)의 말씀 빠짐없이 사뢰소서.
"다짐[誓] 깊으신 존(尊)을 우러러 서원(誓願)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을 도두와 두 손 곧추 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아으, 이 몸을 길이 두고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이루실까 [젛사옵네]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이루실까.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문무왕 때에 불가의 도를 닦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광덕과 엄장이었다. 두 사람은 좋은 벗으로 항상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극락세계로 가는 사람이 꼭 알리기로 하자."고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에 은거하면서(혹은 황룡사의 서거방에 있었다 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신 삼는 것으로 업을 삼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농사일에 힘쓰면서 지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 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에 어둠이 깔릴 때, 엄장의 창 밖에서 "나는 벌써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둘러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풍악 소리가 나고 빛이 땅까지 뻗쳐 있었다. 그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머물던 곳을 찾아가 보니 광덕은 과연 죽었다. 이에 그는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다 마치고 그는 광덕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남편은 이미 죽었으니 이제 나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소?" 하자, 그 아내가 "좋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날 밤 광덕의 집에 머물러 자면서 정을 통하려 하자, 그의 아내가 응하지 않고 하는 말이 "스님께서 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고 하였다. 엄장이 놀라면서 말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안 될 것이 있소?"하자, 그녀가 말하기를 "남편은 나와 동거한 지 10여 년이었지만 일찍이 한 자리에 눕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추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매일 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생각하였습니다. 혹은 16관(중생이 죽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닦는 16가지의 법)을 하여 관이 이루어지면 밝은 달이 문에 들어올 때 그 빛에 올라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정성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서방정토로 안 가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저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 걸음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인데, 지금 스님의 관은 동쪽으로 갈 수는 있을지언정 서방정토로는 갈 수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엄장은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나 곧 원효법사의 거처로 찾아가 정성껏 득도의 길을 물었다. 원효는 정관법을 지어서 권유하였다. 엄장이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한마음으로 관(미망을 깨치고 진리를 통달하는 것)을 닦아서 또한 서방 극락세계로 올라갔다. 정관법은 원효대사의 본전과 『해동고승전』 중에 있다. 광덕의 아내는 분황사의 종이었는데 바로 관음보살 십구응신 중의 하나다. 일찍이 광덕은 이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삼국유사』권5, 감통(感通), 광덕 엄장
<원왕생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첫 줄 '月下伊底亦(월하이저역)'의 해독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과연 작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지요.
먼저 첫 줄의 해독입니다. 향가는 향찰로 표기된 것이며 한자로 음 또는 뜻을 표기하지요. 따라서 어디에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해독에 차이가 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月下伊 / 底亦'으로 끊는 견해와 '月下 / 伊底亦'으로 끊는 견해가 있지요.
전자는 다시 몇 가지의 뜻으로 세분화됩니다.
첫째로 '달의 아래'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下伊(하이)'는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처격 '-해'로 봅니다. 여기 사이시옷을 덧붙여서 현대어의 '-의'로 해독하지요. '底亦(저역)'은 '아래, 밑'이라는 '底(저)'의 뜻에 '亦(역)'을 음으로 읽어 '믿예'로 보고요.
둘째로는 '下伊(하이)'를 '아리', 즉 '아래'로 읽고 '底亦(저역)'을 '저기'로 읽고 있습니다. '또한'이라는 뜻의 '亦(역)'이 어째서 '기'에 가까운 음으로 읽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_-;
셋째로 '月下伊(월하이)'를 '다라리'로 읽는 것입니다. 중세국어에서는 쓰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발음나는 대로 붙여쓰는, 이른바 '이어적기'를 할 수 있었거든요. (예를 들자면 '손이'를 '소니'로 쓰는 것처럼요. 근대국어, 즉 개화기까지의 한글 문헌을 읽는 게 힘든 것도 이와 같은 표기상의 차이에서 오는 이유가 큽니다) 그래서 앞부분 전체를 '달이'로 읽고, '底亦(저역)'을 '엇뎨역', 즉 '어째서'로 풀이하지요. 중간에 왜 '엇'이 끼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후자의 경우 '月下 / 伊底亦'이라 끊고 '달하 이뎨', 즉 '달이여 이제'라고 해독하지요. '下(하)'는 중세국어에서 지금의 '-아'와 비슷하게 쓰였던 말입니다. 부르는 말 뒤에 붙는다는 건 똑같지만(이를 '호격 조사'라고 하지요) 높임의 뜻이 더해진다는 게 조금 다릅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에서 '님금하 아라쇼셔'(임금이시여, 아십시오)와 같이 쓰이는 것처럼요. 그리고 '伊底亦(이저역)'은 '이제'로 간주합니다. 즉 서방정토 왕생의 염원을 직접 달에게 호소하는 노래, 라는 근거를 어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당대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입니다만, '기원'이라는 성격에서 그리고 '호소'라는 정서에서 이 편이 좀 더 묘미가 있다고 보이네요.
작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설이 있습니다. 일부의 향가처럼 누가 불렀는지 모른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적 화자가 달라짐에 따라 해석의 양상이,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정토왕생을 갈구하는 염원의 성격, 기원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정서의 질 등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여기에 관해서 많은 얘기가 있었지요. 대여섯 가지의 견해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발단은 산문기록의 끝 문장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였지요. 원문은 '其婦乃芬皇寺之婢盖十九應身之一德嘗有歌云', 즉 위의 설화에서 밑줄로 표시된 부분입니다. (편의상 一과 德 사이를 끊어 읽었습니다. 물론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德(덕)'을 앞쪽에 붙여 읽으면 광덕의 처가 노래를 지은 것이 되며, 뒤쪽에 붙여 읽으면 광덕이 노래를 지은 것이 됩니다. 여기에 '有歌(유가)'가 과연 '作歌(작가)'와 같은 뜻인가 하는 논란이 추가됩니다. 광덕의 처나 광덕이 노래를 지었다는 쪽에서는 '有歌(유가)'가 '作歌(작가)'의 관례적 표현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작자를 모른다는 쪽에서는 같은 뜻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여기에 9줄의 '此身(차신)'의 문제도 추가됩니다. 과연 '이 몸'은 누구일까요? 광덕의 처든 광덕이든 지은이가 분명히 있다는 쪽에서는 지은이 자신이라고 말하지요. 반면 작자를 모른다는 쪽에는 극락 왕생을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몸'이 될 수 있다는, 시적 자아의 집단성을 얘기합니다. 이런 논의 과정 속에서 광덕의 처는 보살의 화신이니 새삼 극락을 바랄 수 없으며, 표제 역시 <광덕·엄장>이라는 점에서 광덕이 지었다는, 즉 개인의 창작물이라는 설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작자를 모른다는 쪽은 집단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작품을 보고 있고요.
학계의 주류는 <원왕생가>를 광덕의 작품으로 보며, 한 개인의 신앙적 발원을 형상화한 개인적 서정시라고 하지요. 특히 설화 속에서 '달'이 나오고 있으니 노래 속의 달 역시 그가 수행하던 실제 상황에서 보고 있던 달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험의 반영이랄까요. 특히 이 '달'은 이 세상의 나와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서의 기원 대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반면 작자를 모른다는 쪽은 찬불가의 성격상 집단적 상상력이 표현된 것이라고 보지요. 특정 개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보편적·집단적 기원이라고 볼 때- 당대 삶의 고통을(기록은 신라 문무왕대, 라고 나와있습니다. 백제, 고구려, 그리고 당과의 전쟁까지 전란으로 가득한 시기였죠) 정토 왕생의 염원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당대 사회의 민중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종교쪽으로 치우치는 부분이 나오니 역시 가방끈이 짧은 게 또 표시가 나는군요. 음, 그치만 정말 궁금한 건 왜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으면서 10년 동안이나 광덕과 그 부인은 같이 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엄장의 모습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군요'ㅁ'
덧. 역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 역시 이와 유사한 모티브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를 이루기를 바라는 두 친구 - 각각 열심히 수도함 - 한 친구의 득도 - 다른 이의 득도'라는 전체 줄거리 안에 두 친구의 수도 정도를 알아보는 여인이 등장하게 되지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경우 부인이 아니라 야심한 밤에 한 여인이 찾아오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원효산설화>에서도 원효와 의상에게 비슷한 일이 있지요.
다시 덧. 양주동 선생 해독의 [젛사옵네]는 원문에는 없지만 해독을 하며 집어넣은 것이라 합니다. 풀이하자면 나를 버리고 48대원을 이루실까 두렵습니다, 정도겠네요. 하긴 이 모진 세상에 나만 버려두고 극락왕생을 하시겠다니 충분히 두려울 법하지요.
마지막 덧. 김완진 선생의 해독이 어학적으로는 더 근거가 있는 편이라고 합니다. 양주동 선생은 영문학 전공이고 김완진 선생은 국어학 전공이니 일단 기본 바탕에서 차이가 있지요. 어느 순간부터 교과서에서도 김완진 선생의 해독이 더 많이 보이더군요. 물론 영문학 전공이면서도 이 정도까지 해독을 하신 양주동 선생은 정말 국보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입니다. 이 분이 향가 해독에 뛰어든 것도 우리나라 옛 노래인데 일본인(소창진평. 오구라 신페이라고도 하지요)이 먼저 해독한 거에 화르륵 불타오르셔서 그랬다니 충분히 재미있으신 분이지요. 갹설하고, 그렇지만 김완진 선생의 해독에는 약점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4-5줄에 나오는 '攴'자 문제입니다. 목판으로 인쇄할 때라 '支'자가 떨어져나가 '攴'자로 되었으며, 이는 앞의 글자를 특정하게 음으로 혹은 뜻으로 읽으라고 지정하는 '지정문자'라는 설이지요. 물론 원전을 바꾸어 해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정문자라고 본다고 해도 음/훈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 by | 2008/08/11 00:22 | 맛있는 공부 | 트랙백 | 덧글(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