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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천지와귀신을감동시킨신라시대의노래

 

향가 (9) - 도솔가·제망매가

 

* 단 하루지만, 까만 스킨에 살짜쿵 동참합니다:)

classic_8.hwp

今日此矣散花唱良        오늘 이에 「散花」를 불러      오늘 이에 散花 불러
巴寶白乎隱花良汝隱       뿌리온 꽃아, 너는,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곧은 마음의 命을 부리옵기에,      곧은 마음의 命에 부리워져
彌勒座主陪立羅良        彌勒座主를 모셔라!          彌勒座主 뫼셔 羅立하라.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生死路는                         生死 길은
예 있으매 젛이여서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 말도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느닛고.                    몯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같이,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가는 곳 모르온저.
아으, 彌陀刹에 만날 나는                   아아, 彌陀刹에서 만날 나
道 닦아 기다리련다!                    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경덕왕 19년(서기 760) 경자 4월 초하룻날, 해 둘이 나란히 떠서 10여 일간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이 진언하기를,
 "인연 있는 스님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드리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조원전에 단을 깨끗이 모시고 청양루에 행차하여 인연 있는 스님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월명사란 이가 천백사의 남쪽 길로 지나가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들여 단을 열고 계청을 지으라 명했다. 월명사는 왕께 아뢰기를,
 "저는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오직 향가만 알고 범패 소리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이미 인연 있는 스님으로 정하였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다."
고 하였다. 월명사는 이에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 가사는 이러하다.
<도솔가>
 이것을 시로 다시 풀어보면 이렇다.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청운에 한 떨기 꽃 뿌려 보냈네
은근히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
멀리 도솔천의 큰 선가(仙家)를 맞았네

 지금 세속에선 이것을 <산화가>라 하나 잘못된 것이므로 <도솔가>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산화가>는 따로 있으나 문장이 번다해서 싣지 않는다.
 <도솔가>를 지어 부른 뒤 곧 두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왕은 월명사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차 달이는 기구 한 벌과 수정 염주 백 여덟 개를 주었다. 그런데 홀연히 모습이 정결한 한 동자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차와 염주를 받들고 궁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그 동자를 두고 월명사는 궁중 안의 심부름하는 아이라 하고, 왕은 대사의 시중을 드는 아이라 하였으나, 그 현묘한 징표로 보나 모두가 아니었다. 왕은 매우 이상스럽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를 추적하게 하였는데, 동자는 내원의 탑 속에 숨어 버리고 차와 염주는 내원의 남쪽 벽에 그려 놓은 미륵보살의 성상 앞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월명대사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미륵보살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 일은 온 나라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월명사를 공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더 주면서 정성껏 표창했다.
 월명사는 또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그를 추모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지전을 서쪽으로 날려보내 사라지게 했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제망매가>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한 번은 달 밝은 밤에 그가 사천왕사 문 앞 큰 길에서 피리를 불며 지나갔는데 달님이 그 소리에 운행을 멈춘 일이 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월명리라 했으며, 월명사도 이로 인해서 이름이 났다. 월명사는 능준대사의 문인이다. 신라 사람들 중에는 향가를 숭상하는 이가 많았는데, 이것은 대개 『시경』의 송(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찬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바람이 돈을 날려 저승 가는 누이 노자로 쓰게 했고
피리 소리가 밝은 달을 흔들어 항아를 머물게 했구나
도솔천이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한 곡조로 쉽게 맞았네.


- 『삼국유사』권5, 감통(感通), 월명사 도솔가

 배경 설화도 그렇고, 지은이도 그렇고 <도솔가>와 <제망매가>는 같이 설명하는 게 편하지요:) 특히 향가를 다루며 8세기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일단 당대 최고의 향가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월명사가 4구체의 향가를 창작했지요. 이 <도솔가>는 '호칭-명령-가정-위협'이라는 주술 노래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물론 불교노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불교의 의식에 사용된 주술계 노래라는 견해가 타당해 보이기에 이쪽을 따릅니다), 위협적인 어법이 없으며 명령도 약화되어 나타납니다. 즉 신비한 주술의 세계에서 서정적인 불교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민요계 향가가 상층부로 가서 서정시가가 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뒤에서 볼, 동시대의 <도천수대비가>는 사뇌가계 향가가 민중층으로 내려가는 양상을 보여주고요. 이를 통해 향가가 정말 명실상부한 '신라인의 보편 시가'로 확립됨을 알 수 있습니다.

 <도솔가>를 먼저 보도록 할까요. 2행의 '巴寶'가 해석의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양주동 선생은 뿌리다(散)로, 홍기문 선생은 '빠호'(옛 한글이 안 먹히는 슬픔ㅠ 첨부된 한글 파일을 참조하시면 좀 도움이 될 듯하네요;;)로 보아 여러 꽃 중에서 선발된 것으로, 김완진 선생은 '돋우다/솟구치다'로 본다네요. 해석만 보면 꽤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 정작 앞뒤의 문맥과 함께 보면 셋 다 크게 차이는 나지 않습니다. 산화공덕과 관련 있는 꽃, 정도가 되겠네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리는 또 다른 문제는 '① 유리왕대의 도솔가와 같은가 ② 도솔가와 산화가의 관계는 어떤가'라네요. 차례대로 살펴보지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1, 유리왕 5년의 기록을 보면 유리왕은 국내를 순행하다가 늙은이가 얼어죽을 지경이 된 것을 보고 자신의 죄라고 말하며, 관리에게 명하여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문하며 부양케 하였다고 합니다. 이 해에 민속이 즐겁고 편안하므로 비로소 <도솔가>를 지으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였다고요. 이것과 향가 <도솔가> 둘 다 '도살풀이/도살노래'라고 하여 회생(回生), 부활(復活), 복원(復元)의 뜻을 가진, 같은 향가라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유리왕대의 <도솔가>는 치리가(治理歌)이고, 월명사의 <도솔가>는 불교 사뇌가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요. 아마 후자쪽이 더 타당하리라고 봅니다. 이 맥락에서 '민속이 즐겁고 편안'한 것과 관계가 있는 노래가 나올 까닭이 없으니까요.
 다음은 <도솔가>와 <산화가>와의 관계입니다. 양주동 선생의 경우, 1행에 '散花唱良'이라고 하므로 원래 <산화가>로 지어진 것이라 하는 반면, 이전의 오구라 신페이나 이후의 많은 학자들은 <산화가>를 순불교적 게송 같은 것으로, <도솔가>는 산화의식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지요. 종교 얘기만 나오면 가방끈 짧은 저는 입다물고 조용히(…)
 '두 개의 해가 함께 보였다[二日竝現]'이라는 산문 기록에도 이견이 있더군요. 하나는 기록 그대로를 존중하여 태양계의 이변을 해가 두 개인 것처럼 인지했다는 의견이며, 다른 하나는 신라 정치 사회의 변혁을 담고 있다는 의견입니다. 이를테면 군왕이 있음에도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급격하게 부상하는 것 말이지요. 전자든 후자든 노래의 성격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보이지만- 왠지 후자쪽이 더 강하게 끌리네요. 글로써 정치적 변란을 잠재웠다고 할 수 있는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다음은 <제망매가>입니다. 멋모를 때는 '제망/매가'라고 읽었는데, 정확하게는 '제/망매/가'가 맞지요. 사실 해석상의 큰 차이는 없습니다. 2행에서 '(죽고 사는 길이 - 여담이지만, 북한의 '죽사릿 길'이란 표현도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렸다고 봅니다) 여기 있으매, 두려워하고'라는 해석과 '~ 있으매, 머뭇거리고'라는 해석이 존재하지만 전체 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지요. 또한 10구체 향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예시로 쓰기도 좋은 작품입니다.
 우선 1-4행에서는 누이의 죽음에 마주선 괴로운 심경이 잘 드러나 있지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 것인가'라는 탄식 속에서 육친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 5-8행에서는 개인적인 아픔이 생명체 일반의 원리로 확대되고 있고요. 모든 유한한 생명을 지배하는 힘인 '바람'과 보잘것 없는 개체의 이미지인 '잎'의 대립적 심상에서 모든 생명체의 무상성(無常性)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아참, 그리고 흔히들 '한 가지'는 부모로, '잎'은 형제로 해석하지만 이를 좀 더 확대해서 우리가 머무는 세상과 모든 인간 존재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전개된 시상은 9-10행에서 집약·마무리됩니다. 첫머리의 감탄사는 이처럼 심화된 고뇌의 극한에서 터져나오는 탄식이자 종교적 초극을 위한 탄성이기도 하지요. 즉, '감탄'이라는 것이 인간이 경험적으로 예측가능한 수준을 넘어설 때 나온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절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후에는 지상적 삶의 무상함을 넘어 광명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불교적인 발원(아미타신앙)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러고보면 육친의 죽음을 다룬 시가 참 많군요. 아들의 죽음을 다룬 <유리창Ⅰ>이나 <은수저>, <눈물>, 형제의 죽음을 다룬 <이별가>, <하관>, <가을 무덤-제망매가>… 그 중에서 똑같이 누이의 죽음을 소재로 한 <가을 무덤 - 祭亡妹歌(제망매가)>를 소개하며 오늘은 이만 끝낼까 합니다.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神經을 앓는
中風病者로 태어나
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가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 written by 기형도

 다음에는 월명사와 쌍벽을 이루는 충담사의 향가가 이어지겠습니다. 분명히 또 엄청 길어지겠지만-_- 반(半)굽이를 돌아나온 듯하니 무언가 좀 뿌듯하네요^^a

by 玄月 | 2008/11/20 20:41 | 맛있는 공부 | 트랙백 | 덧글(2)

향가 (1) - 개관

 

 향가는 기본적으로 '자국어로 된 시가를 통칭하는 신라시대의 용어'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향찰로 표기된 시가'라고 할 수 있지요. 이 향찰이라는 게 묘한 언어입니다. 한글이 발명되지 않았을 시기, 실질적 의미를 가진 부분은 새김(訓)을, 문법적 요소는 소리(音)을 빌려쓰는 것이 대략적인 원칙입니다만, 뭐라고 딱 잘라서 얘기할 수 있는 공식이 없기에 해독하는 사람에 따라 향가의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게 되지요. 어쨌든 이 '향(鄕)'이라는 명칭을 두고 '시골'이라는 의미를 주목하여 한시(漢詩)나 당시(唐詩)에 비해 우리 시가를 낮추어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옛 문헌들의 용례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라는 게 요즘의 학설이지요.

羅人尙鄕歌者尙矣, 盖詩頌之類歟. 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非一 -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조
◈ 신라 사람들 중에는 향가(鄕歌)를 숭상하는 이가 많았는데, 이것은 대개 시경의 송(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끔 천지(天地)와 귀신(鬼神)을 감동(感動)시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신라인들이 향가를 폭넓게 향유했다는 증거로 드는 문장입니다. 시험 때 '감동천지귀신비일(感動天地鬼神者非一)'이라는 구절은 통째로 잘 인용해서 썼지요. 한 문제당 B4 답안지 한 바닥 이상 채우는 시험을 치다보니 별의별 걸 다 쓰게 되더군요. (시험 시간은 네 시간, 시험 문제는 열 문제였습니다. 향가의 배경설화에서 뽑아낸, 교수님 본인 말씀으로도 '쪼잔한' 단답형 문제가 열 문제 더 있었지요)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주술성'을 뽑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문학적인 감동의 폭과 깊이'가 컸다는 걸로 많이 해석하더군요.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 『삼국유사』 진성왕 2년조
◈ 왕은 본래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상통하였는데 지금은 안으로 들여 일을 보게 하였다. 이에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수집(修集)하게 하였는데 그 책을 일러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신라시대 세 명의 여왕 중 진성여왕의 기록입니다. 위홍이라는 남자가 아마 유모의 남편이던가 그랬죠-_-; 어쨌든 (여)왕의 남자, 위홍과 대구화상이 당대의 향가를 모아 편찬한 책이 <삼대목>입니다. 찾으면 떼돈을 벌 수 있지요+_+! 아니 그 전에 수많은 전국 수험생들의 원망을 받을지도요.
 '삼대'는 아마 신라 상/중/하대를 이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그 때에도 자기 시대를 저렇게 인식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성골이 왕위를 잇던 때가 상대, 무열왕계가 왕위를 잇던 때가 중대, 그 이후를 하대라고 통칭하더군요. 현재 남아있는 향가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만 남아있는 것을 볼 때(『화랑세기』 얘기도 나옵니다만 그건 밑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저 책을 찾으면 향가 연구의 폭이 확실히 넓어질 것만은 분명하지요. 예전에 모든 고전문학을 '다산과 풍요'에 갖다붙이던 문태옹께서는 "향가를 일본인들이 먼저 연구했던 것을 볼 때 분명히 일본 어느 곳에 『삼대목』이 남아 있을 거다."라며 순진한(?) 1학년생들을 현혹하셨지만, 아니 아주 신빙성이 없는 얘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 더 무섭… 글쎄요. 언제 어떤 경위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는 책들이 한둘이 아닌 게 안타까울 뿐이죠. 향가여요론을 배울 당시 교수님께서 '『삼대목』을 찾아라'라는 제목의 역사추리물을 써보라는 과제를 주시려는 걸 결사반대하던 기억도 아련하게 떠오르는군요.

釋永才, 性滑稽, 不累於物, 善鄕歌 - 『삼국유사』 영재 우적조
◈ 영재(永才) 스님은 천성이 활달하여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향가(鄕歌)를 잘 지었다.

 영재 스님은 나중에 <우적가>를 다룰 때 볼 사람입니다. 향가의 작자층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낭승(郎僧. 화랑의 무리에 속해있는 스님을 말합니다)에 관한 언급이 많지요. 그 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十一首之鄕歌, 詞淸句麗 - 『균여전』 제8
◈ 열한 수의 향가(鄕歌)의 사(詞)는 맑고 구절(句)이 수려하였다.

 『균여전』에 나올 향가는 다시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므로 여기서 잠깐 짚고 가겠습니다. 이럴 땐 왜 옆에 통사가 없는 거지ㅠㅠ 고려시대 초기, 균여라는 스님이 <화엄경>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깨달음을 10수의 향가로 정리하고, 결사라고 할 수 있는 1수를 더해 모두 11수의 향가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를 최행귀라는 이가 한시로 옮겼다고 하고요. 최행귀의 번역과 관련하여 '한시는 중국말을 얽어매어 5언 7자로 갈고 다듬은 것이고, 사뇌가는 우리말을 3구 6명으로 끊고 가다듬은 것이다(詩搆唐辭 琢磨於五言七字, 歌排鄕語 切磋於三句六名)'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도 해석이 분분한데, 최근(2006년)에 이걸로 학위 논문을 받으신 분이 있다 그러네요.
 11수의 향가이지만, 보통 <보현시원가(普賢十願歌)>,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라고 부릅니다.


※ 갈래 체계
 향가 25수는 구비문학적 성격을 띤 작품부터 지은이가 확실한, 세련된 창작시가까지 걸쳐 있을 뿐 아니라 그 형식과 내용도 단일하지 않지요. 때문에 갈래 체계에 대한 설도 연구자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울 때에는 성기옥 선생의 견해가 민요계 향가(10구체-여기서의 '구'는 현대시의 '행' 개념과 같습니다- 이외의 향가)와 사뇌가계 향가(10구체 향가)로 깔끔하게 나누어져서 좋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사뇌'라는 용어는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으니 차사사뇌(嗟辭詞腦)의 격조가 있다(始作兜率歌, 有嗟辭詞腦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따온 것입니다. 요즈음은 사뇌가를 10구체 향가-개인창작 서정시라는 향가의 특정 갈래로 보고 있지요.


※ 형식
4구체 향가 : <서동요>, <풍요>, <헌화가>, <도솔가>
◎ 8구체 향가 : <모죽지랑가>, <처용가>
◎ 10구체 향가 : <혜성가>, <원왕생가>, <원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대비가>,
  <우적가>, <보현십종원왕가>


 향가의 형식을 보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바로 8구체 향가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지요.
 향가를 제일 처음 해석한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선생은 향가에는 4, 8, 10구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후 조윤제 선생은 4, 8, 10구체 설을 수용하면서 특히 10구체 향가는 '전대절(前大節) 후소절(後小節)'의 한국시가의 고유한 특질 - 9구 첫머리의 감탄사를 기준으로 앞부분이 길고 뒷부분이 짧은 것을 말합니다. 경기체가에서도 '위 경(景)기 엇더하니잇고'를 중심으로 앞부분이 더 길지요. 시조 역시도 초·중장과 종장으로 시상의 흐름을 잡기 때문에 이는 타당한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표현했지요. 조동일 선생은 4, 8, 10구체는 인정하되 두 줄씩 붙여서 각각 두 줄, 네 줄, 다섯 줄 형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4, 8, 10구체가 있다는 쪽에서는 4구체→(6구체)→8구체→10구체로 발전했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후렴구를 뺀 <정읍사>가 6구체라며 시조의 기원이 된다고 주장한 분도 있었지요'ㅁ') 기록을 보면 같은 시기에 4구체와 10구체가 공존한 것이 보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발전설이 아닌, 공존설을 얘기합니다. 이는 8구체를 부정하는 쪽도 마찬가지고요.
 8구체를 부정하는 쪽에서는 일단 남아있는 8구체 작품의 수가 적다는 것을 이유로 듭니다. 향가 전체가 많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예요. 특히 8구체로 분류된 <모죽지랑가>는 10구체 향가가 가지고 있는 미적 특질을 보여준다는 점, 『삼국유사』의 원문 자체에 2구 정도의 빈 공간이 남아있다 - 옛날 책에는 띄어쓰기가 없었으니 말이죠 - 는 점에서 10구체였을 거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홍기문 선생이나 성기옥 선생, 이외에 최근의 연구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이는군요.
 8구체 향가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몇년 전 발견된 책인 『화랑세기』와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 실려있는 <승랑가>와 <청조가> 2수의 향가는 모두 8구체거든요. <승랑가>는 사다함이 가야국 정벌을 위해 출병할 때 미실(김별아의 소설, 『미실』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그녀입니다)이 그를 전송하며 지어부른 노래이고, <청조가>는 사다함이 돌아온 후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미실을 보며 슬퍼하는 감정을 실은 노래라고 하는데- 책 자체에 대한 진위논란이 있기 때문에 국문학에서는 아직 깊게 다루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확실한 건 『삼대목』이 발견되어야 알 수 있겠지요.


※ 작자
 작자는 가공인물로 보는 견해와 실존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전자는 향가 관련 설화를 볼 때 설화의 인물들의 행적이 불분명하며, 작자의 이름이 작품의 성격과 관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 이를테면 왕의 약속과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신충(信忠), 피리를 잘 불어 달을 멈추게 했다는 점에서 월명사(月明師), <안민가>를 지어 바쳐서 충담사(忠談師) 등등 - 을 근거로 들고 있지요. 반면 후자는 설화와 관계없는 <모죽지랑가>의 작자를 예로 들며 전자를 반박하고, 실존했던 사람이나 혹은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후대의 재명명(再命名)이라고 봅니다.
 실존인물로 볼 경우는 과연 이 작자층의 신분이나 성격을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가도 논란이 됩니다. 보통 좀 세밀하게 나누면 승려, 화랑, 여류, 민요계, 실명(失名) 정도로 보지요. 하지만 이 분류는 서로 겹치는 것도 있고, 연구자에 따라 하나의 작품을 서로 다른 작자층으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사뇌가에 한해서만 그 작자층을 고려한다면, 보통 화랑의 무리에 속해있으면서 승려이기도 한 '낭승(郎僧)'을 주 작자층으로 봅니다. 월명사가 왕에게 얘기할 때 (다음에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다루면서 더 얘기하겠지만요) '저는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라는 걸 근거로 들 수 있지요. 어찌 되었든 간에 지식인 혹은 문화인이 10구체 향가를 지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명색은 개관이라고 했지만, 양이 만만찮군요-_-; 과제로 낸 서평 외에는 이렇게 긴 글을 쓰는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여튼 다음부터는 향가 각각에 대한 설명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시험 공부 겸 자료 정리라고 말하지만 이것도 생각보다 은근히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처음 다짐과는 달리 포스팅이 좀 불규칙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 엠파스에서 제공하는 백과사전 '향가' 항목에도 설명이 잘 나와 있답니다:)

by 玄月 | 2008/07/25 00:16 | 맛있는 공부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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